불교의 교전을 크게 둘로 나누어 보면 소승교(小乘敎)와 대승교(大乘敎)로 분류 할 수 있다. 이 분류에서 소승교는, 향락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번뇌를 부정하고 엄격한 계율주의를 강조한다. 하지만 석가의 재세시에는 인도의 민중들이 현세주의, 향락주의 풍조가 강했다 이것을 석가는 고(苦),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를 말씀함으로서 향락주의를 훈계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권력이나 경제력, 명성, 명예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함에 대한 질책이다. 이 소승교의 경향이 작금의 정치 행태의 풍토와 유사하다. 코로나 19의 전염병이 끝이 보이지 않고 그로인한 경제적 손실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아 그것마저 힘든 상황인데 법무부장관과 검찰 총수의 충돌이 계속되고 덩달아 대권주자의 반열에 올라선 인사와 일부 정치인이 여전히 너도나도 자신의 이름을 속성 열차에 부상시켜 탑승하려 발버둥을 치고 있다.

모두 옳은 말만 하는 것 같아 보통의 국민들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의식의 혼란을 일으키게 한다. ‘참’이란 단어는 표음으로 굳어 그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더불어 가치관의 혼란이 오고 역사관마저 흔들리게 한다. 잘 알다시피 조선시대 5백년 역사에서 무수한 당파 싸움으로 사화를 일으키고 죄 없는 인재들이 진영의 수렁에서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다.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조상의 얼이 아니라 나쁜 것을 계승하는 현상들이 정치권에 휘돌고 있다. 그 시대에도 숨죽여 있던 백성들은 말 한마디 못하고 있다가 더러는 의로운 난을 일으켰지만 권력 앞에 처참히 무너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현대는 그나마 문명의 이기가 극도로 발달하여 sns를 통하여 자기의사를 자유롭게 표시한다고 하지만 그것의 폐해 또한 적지 않다. 일종의 동맹성 데모대를 만들어 옳고 그름의 여과 없이 동맹의 의사에 반하면 융단 폭격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중에는 정치 혐오증으로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지 않는 말없는 국민들도 상당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아가 정치보복인지 죄 값을 치르는지 판단되지 않는 전임 대통령이 줄줄이 구속되고, 권력과 밀착되어 있다는 라임사태도 본질에 접근해야 하는데 방향타를 잃고 여권이 더 연루되어 있느냐, 야권이 연루 되었냐, 서로의 흠집만 잡으려 하는 이전투구의 양상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 뒤에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피해자의 분노가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빈대잡기에 여념이 없다.

어디 그뿐이랴. 복리 증진에 무리수를 두다보니 예산은 바닥나고 그것을 걱정하는 경제장관이 고육지책으로 세금의 확대 주장을 하지만 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이유로 억지성세 감면 정책을 펴게끔 위협(?)하여 궁극에는 후손에게 국가 채무를 과다하게 떠 안겨, 현재만 면피하고 보자는 철면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거기에다 정책은 갈팡질팡하고 어제의 말이 오늘 뒤집히고 오늘의 말이 내일 뒤집히는 말장난 같은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반기조차 함부로 들 수 없어 가면을 쓰고 몰래 밖을 엿보아야 하는 ‘당신의 얼굴’이 부끄럽기만 하다. 그것은 뱀이 똬리를 틀고 물어야 할 대상을 찾고 있지만 섣불리 물었다가 오히려 그 발등에 밟힐까봐 움츠린 체 허물을 벗어야하는 형국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이러한 현상은 ‘자아’가 갈망하던 욕망이 분출구를 찾지 못해 허무의 공간을 헤매다가 정서 장애와 결핍에 이르러 마침내 우울증을 앓을까 두렵다. 하지만 그 증상들이 잠재기를 거쳐 잠복하고 있다가 견디지 못해 도대체 ‘세상은 왜 이래, 하고 밖으로 튀쳐 나올 때, 잠자고 있던 화산이 폭발하여 세상이 깜짝 놀랄 정도로 화산재로 오물들을 덮을 날이 오리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김현탁 한국현대문학연구소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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