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교육을 이념의 프레임에 가두지 않고 학생 중심의 미래교육이라는 큰 틀에서 소통과 공감의 교육행정을 펼쳐야"라는 한 지역 교총의 요구. 기자간담회에서 한 당선인이 "양천구의 변화와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공감하면서 신뢰를 쌓아 양천을 발전시키겠다"고 밝힘. 대구 수성구의 한 선거구에서 모 후보가 "소통과 공감의 생활정치를 슬로건으로 내세워 당당히 당선됐다"고 말했다는 보도….

‘소통’과 ‘공감’은 이번 선거에서 후보들이 가장 많이 써먹은 말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람 간의 고립과 거리 두기 등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 생활을 길게 한 탓인지 소통과 공감이란 말 자체가 아주 강력한 메시지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들이 정치적 수사에 그치고 말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말이 그럴 뿐, 실질적으로 이 슬로건을 구체화하는 사업을 제시한 정치가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거대 담론이 아닌 일상의 시선으로 다독이는 정치, ‘나’를 먼저 돌아보고 이웃을 먼저 챙기는 정치가 필요한데도 이를 실현할 공약을 선뜻 내놓지 못하고 대부분의 정치가들이 거대 담론 쪽에 쏠려 있는 공허한 판이 되어버린 것이다.

담장 허물기 운동 같은 일상적으로 절실한 것이 왜 나오지 않을까, 가장 필요한 때인데도 말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전국의 도시들에는 지금 엄청난 개발 바람이 불고 있다. 대부분 아파트 같은 고층 빌딩 짓기에 골몰하고 있다. 이러한 개발을 도시의 발전으로 보기를 원하지만, 발전과는 역행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가르고, 주거 공간의 사유화로 인한 구획화와 울타리 치기로 결국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답답한 개발 바람에 아파트 담장 허물기 운동이 신선한 대안이 될 수 있는데도 이를 선거공약으로 내놓은 이는 한 사람도 없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담장 허물기
대구시가 벌여온 담장 허물기 운동이 새삼 떠오른다. 흔히 보수와 수구의 도시로 일컫는 대구에서 이런 열린 의식이 나타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운동은 1996년 10월 서구청 담을 무너뜨린 것으로 출발했다. 대구 시내에서 30㎞가 넘는 담장이 사라졌다느니, 36만8천여㎡의 가로공원 조성 효과, 주택·아파트 500여 곳을 비롯해 관공서 120여 곳, 보육·복지·종교시설 120여 곳, 상업시설 70여 곳, 학교 50여 곳, 공공의료시설 20여 곳, 기업체 등 900여 곳의 담장이 사라졌다는 오래 전의 통계들은 얼마나 신선했던가.

대구시는 적극적으로 이 사업을 펼쳤다. 담장 허물기 대상지로 선정되면 무상 시공과 조경 자문 등 혜택을 줄 정도였다.

이 사업은 각 대학 학생들과 교수들의 논문에까지 자주 인용됐고, 2004 대한민국지역혁신박람회에서는 우수 사례로 선정됐다. 서울시를 비롯, 성남, 부천 등 전국 1천여 개 기관 및 시민단체가 이 운동을 배우기 위해 대구를 방문했다. 동참 사례도 이어졌다. 서울에서는 교통방송본부, 성북구 종암경찰서, 강남병원 등 공공기관과 초·중·고교 등 500여 곳이 담장을 허물었다. 부산도 부산대병원과 동부경찰서 등 공공기관과 학교 200여 곳이 담장을 무너뜨렸고, 대전시가 2003년부터 유성구청, 중앙고 등 40여 곳의 담장을 허는 등 전국적으로 운동에 동참했다.

이웃 간 소통과 마을공동체 문화 형성, 도심 녹지 공간 확충 등에 기여한다는 취지를 말하기도 하지만, 이 사업은 소통의 상징으로 더 떠오른 것이다. 이웃 사이를 가로막는 담장을 허무는 것은 열린 사회 형성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이제 ‘담 없는 마을’ 조성으로 진화 중이다.

◇이제는 아파트 소통으로
"한국인은 한 방향으로만 굵고 곧게 난 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로와 샛길, 갈림길과 곧은길이 적절히 섞인 ‘재미있는’ 길을 좋아하며 이런 길을 즐긴다. 한옥에 동선의 종류가 많다는 것은 매우 과학적이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는 동선이 여러 개라는 사실은 이동 과정에서 느끼는 경험의 종류가 많다는 뜻이다. 이것은 지혜의 선물이다. 시간 따라, 형편 따라, 기분 따라, 계절 따라 ‘골라 가는 재미’가 있다."

다음을 뒤적이다 발견한 한 건축 전문가의 글이다. 한옥 건물 내의 동선 배치에 대한 말이지만, 한국인의 심성이 지향하는 길에 대한 철학을 담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그래, 우리가 걸어온 길도 그렇다. 길은 그래야 하는 것이다. 곧고 큰 길만 중요한 게 아니다. 샛길과 갈림길, 좁다란 길들이 적절하게 섞인 가운데 그 길들이 사통팔달로 소통되어야 한다.

최근 서울 성북구, 대구시 등이 이웃 간 소통을 위해 ‘공동주택 지원 사업 공모’를 실시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아파트 입주민 간 소통과 교류 확대를 위한 의도다. 공동주택 입주민이 스스로 기획하고 참여해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고 소통감과 유대감을 강화해 이웃과 소통하고 화합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운동이 확산되는 듯하다. 아파트라는 곳이 워낙 폐쇄적이다 보니 이런 소통의 방안들이 나오는 게다. 그러나 여기에는 간과해선 안 될 게 있다. 아파트 내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아파트와 주변 동네 간의 소통 역시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사방 바리케이트를 치듯이 꽉 닫힌 아파트 담장은 부근 동네 주민들을 철저하게 소외시킨다. 아파트 담장을 허물어 길을 공유하면 금방 갈 길을 몇 배나 돌아가야 하는 불편이 크다. 방범 등 여러 이유를 들지만, 공유해야할 길까지 그렇게 사유로 묶는다고 해서야 되겠는가?

이제는 아파트가 고립과 폐쇄가 아니라 소통으로 열린 이웃과 함께 하는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아파트 담장 허물기 운동이 절실한 까닭이다.

이하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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