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노래로도 지어져 우리 귀에 낯익은 이 시는 고려말 고승 나옹의 것이다.

고려말 학자였던 목은 이색이 지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는 회암사의 전각배치를 자세하게 기술한 책으로 나옹의 뜻을 받아 회암사의 중창을 마친 익륜(絶磵益倫)이 대사역을 마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각전(覺田)을 이색에게 보내 받아온 기문이다.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회암사의 역사

수조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회암사는 천보산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임진왜란때 이곳으로 숨어든 어느 왕이 전쟁이 끝나고 궁궐로 되돌아간 뒤 전쟁의 칼바람을 막아준 이 산을 금은으로 치장하라는 명을 내리자, 신하들이 꾀를 내어 이 산의 이름을 ‘천보산’이라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 수조기는 회암사의 전각배치를 상세히 적고 있는데, 이를 통해 건물이 262칸이고, 불상 높이가 15척인 것이 7개이며, 관음상은 10척이 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회암사의 창건시기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금나라 사신이 1174년(명종 4년) 회암사에 다녀갔다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1313년(충선왕 5년)에 태고 보우가 이 절에서 광지(廣智)에게 출가했다고 하는 기록을 통해 12세기 무렵 회암사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회암사가 본격 창건된 것은 인도의 왕자이자 승려인 지공에 영향을 받은 나옹에 의한 것이다. 지공은 1326년 고려에 와서 2년 7개월 머물렀지만 고려인들의 불심에 크게 감동을 받고 돌아갔다.

1348년 나옹은 중국 연경으로 지공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았고, "고려로 돌아가서 삼산양수간(三山兩水間)에 머물면 불법이 크게 일어난다"는 수기를 받고 고려로 돌아와 천보산 아래에 나란타사를 재현하고자 하여 1374년부터 1376년 사이 회암사의 중창을 이루게 된다.

조선시대 들어서 유생들의 거센 반대에도 회암사는 왕실의 원찰로써 자리잡으며 선종사원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태조는 무학 자초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며 수차례 행차했고, 태상왕이 되어서는 회암사에 궁실을 짓고 머무르기도 했으며 태종 5년(1405) 무학이 입적하자 그의 탑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 후에도 1472년(성종 3)에는 세조비 정희왕후에 의해 대중창이 이루어졌고, 중종비 문정왕후가 불교를 중흥코자 했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는 무차대회를 열고자 했으나, 문정왕후는 대회 전날 갑자기 죽었으며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가고 회암사는 원인모를 화재로 폐사되었다.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전통사찰 회암사의 창건

이후 1821년(순조 21) 이응준이란 사람이 삼화상의 비와 부도를 제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즉 이응준이 삼화상의 비와 부도를 제거하고 선친의 유해를 안장하면 좋을 것이라는 술사 조대진의 말을 듣고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후 이 일이 세상에 알려져 이응준은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고, 1828년(순조 28) 다시 비와 부도가 세워지고 현재의 회암사가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다.

1849년(헌종 15년) 몽성(夢惺)화상이 중건하고, 1922년에는 월초(月初)화상이 대웅전을 지어 중앙에 불상을, 서쪽 벽에 삼화상의 영정을 봉안했으며, 1976년 호선(昊禪)스님이 대웅전을 중건하였고, 1986년에는 요사와 설법전이 중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회암사의 주요 전각으로는 대웅전과 관음전, 그리고 조사전이 있는데, 최근 건립된 범종각과 요사체도 함께 모여 있다. 주변에 있는 문화재로는 선각왕사비(보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보물), 쌍사자석등(보물), 지공선사 부도및석등(도유형문화재 제49호), 나옹선사 부도및석등(도유형문화재 제50호), 무학대사비(도유형문화재 제51호)가 있다.

회암사 좌측 산등성이에 보이는 비는 선각왕사비 모조비로 원래의 비는 1997년 천보산에서 생긴 산불에 의해 훼손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보존처리를 거쳐 현재는 중앙불교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고 현장에는 거북받침만 남아있다. 선각왕사비는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워진 비로 나옹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 이 비에 쓰인 예서는 중국에서도 거의 사용하지 않을 때였기에 당시 우리나라의 예서 연구 수준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회암사 우측 소나무 사이에 여의주를 다투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된 탑이 있는데, 이것은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이다. 조선이 건국된 1392년 10월 무학대사(1327~1405)가 왕사로 책봉되면서 회암사에 주석하게 되었는데, 무학대사 주석 이후 회암사는 조선의 왕실불교를 대표하는 기도처가 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왕사인 무학대사를 위해 1397년 이곳 회암사에 부도를 미리 만들도록 하였는데 이 부도가 바로 무학대사탑이다.

무학대사비 기록에 의하면 무학의 사리가 안치된 것은 1407년(태종 7)으로 무학이 입적한 해에 건립되었는데 조선전기 탑 중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꼽힌다. 이 탑은 8각의 형태로 2단의 장대석을 두른 뒤에 탑을 건립했고, 탑 주변에 8각의 난간이 둘러져 있다. 탑은 기단, 탑신, 개석으로 구분되며, 기단은 구름이 새겨진 지대석, 복련과 귀꽃이 조각된 하대, 화문이 조각된 중대, 앙령과 당초문이 조각된 상대로 이루어졌다. 탑신은 구형(球形)으로 운룡(雲龍)이 조각되어 있고, 남쪽면에는 용이 조각되어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북서쪽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나머지 부분은 구름으로 채워져 있다. 정연한 결구수법과 우수한 치석수법을 통해 국공(國工)이나 뛰어난 석공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학대사탑 바로 앞에 무학대사 쌍사자석등이 있다. 이 석등은 전체적으로 네모꼴을 띠며 지대석과 하대석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 졌는데, 하대석에는 모두 8판의 연꽃이 두 겹으로 표현되었다. 간주석은 두 마리의 사자로 조각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석등의 기본형식을 따르고 간주석이 2마리의 사자로 대체된 이형(異形)에 속한다. 또한 목조건축의 지붕에서 유래된 옥개석의 형태, 화사구를 두 방향으로만 내고 있는 점, 그리고 사자를 비롯하여 연꽃무늬 등의 표현방식에서 시대적인 양식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

무학대사탑 앞쪽으로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도유형문화재 제49호)과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도유형문화재 제50호)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이 부도들의 특징인 탑신부와 기단 중대석이 구형(球形)이라는 점은 고려말기 처음 나타나는 특징으로 이후 조선전기 새로운 부도형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 ‘양주 회암사지’

이제 현재의 회암사가 존재하기 전 조선시대 최대 선종사원이자 왕실사찰이었던 회암사지로 가보자. 1만여평의 넓은 공간에 8개의 단으로 조성되어 건물만 70여개 있었던 커다란 사찰터로 지금은 터만 남아있지만 출토되는 유물과 유적으로 볼 때 궁궐이었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1997년부터 시작되어 20여 년간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아주 특별한 ‘왕실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창덕궁과 같은 궁궐이나 옛 관아지에서 볼 수 있는 8단지 정청의 건물구조, 역시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정청 뒤편의 화계(花階), 또한 궁궐에서나 사용하는 봉황·용문양 막새, 잡상, 그리고 조선 왕실의 관요인 광주 가마터에서 구워진 백자들이 그것이다. 또한 회암사지에서 확인된 70여 개의 건물 중 40여 기의 건물에 온돌시설이 있어 한국의 난방역사를 살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기도 하다.

회암사지 유적
회암사지 유적

이렇듯 오랜 역사와 중요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있는 양주 회암사지가 올해 1월 13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선정되었다. 양주 회암사지가 가지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는 "양주 회암사지 유적이 14세기 동아시아에 만개했던 불교 선종문화의 번영과 확산을 증명하는 탁월한 물적 증거라는 것이며, 또한 불교 선종의 수행 전통, 사원의 공간구성 체계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양주 회암사지 유적은 20여 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사원의 배치와 형태가 확인된 불교 사원유적으로, 이 유적은 불교 선종의 수행과 생활의 규범집인 ‘청규’에 따라 조성되었다. 또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고고학적 증거는 14세기에 만개했던 선종의 동아시아적 유행과 수행 전통, 청규에 기반한 선종사원의 공간 구성체계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올해 1월 잠정목록에 선정된 ‘양주 회암사지 유적’의 등재신청서가 7월 20일 세계유네스코센터에 영문으로 제출되었고, 절차를 거쳐 7월 26일 정식으로 등재되었다. 잠정목록으로 등재되었으니 세계유산으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오랜기간 동안 묻혀 잠자고 있던 유적이 살아나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내를 넘어 세계로 나아가려고 한다. 태동을 시작한 양주 회암사지에 많은 관심과 방문을 바란다.

김동규 양주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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