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튀르키예 군인들은 전쟁으로 상처 입은 아이들의 부모를 자처하며 ‘수원앙카라학원’을 세웠다. 한국전, 그 참혹했던 전쟁 속에도 튀르키예 군인들은 수원 앙카라 학원에서 이 땅의 아이들을 보호하고 가르쳤다.

 70년이 지난 지금 점차 희미해지는 앙카라학원의 의의를 재조명하기 위해 중부일보는 8월 13일부터 21일까지 튀르키예 이스탄불·앙카라 참전용사회, 튀르키예 국방부 군사역사기록보관소, 주 튀르키예 한국대사관, 적신월사(적십자) 등을 방문해 취재했다. 

향후 중부일보는 10회에 걸쳐 ‘월드리포트 앙카라 학원의 기억과 기록’을 연재하며 참전 용사들의 생생한 증언과 현지 기록을 통해 한국과 튀르키예 우호관계의 원천을 재확인한다.  


용맹함으로 뒤지지 않는 튀르키예군
1950년 평안도군 첫 전투서 후퇴… 다음해 용인 김량장리전투서 설욕
참전국 중 튀르키예군 전사자 수 미국 영국에 이어 세번째로 많아
부상 실종 포함땐 타국가의 두배

"폐허가 된 마을 어귀, 7살 여자아이가 혼자 남겨져 있었다. 아이는 말을 하지 못했다. 어떤 참혹한 광경을 목격해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아이를 안심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아이는 수차례 나의 손길을 뿌리쳤다. 끌어안고 적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키고자 했지만 되지 않았다. 이곳은 전선, 아이만 두고 올 수 없었다. 아이는 저항했지만 우선 부대 의무관에게 데려갔다."

-한국전 튀르키예군 참전용사 제2여단 정보장교 나즘 뒨다르 대위의 회고 가운데-

한국전 발발 이후 70년의 세월이 지났다. 참화의 흔적은 지워지고 나라는 재건됐다. 상흔은 살아있는 이의 마음속에 그리고 기록 속에만 남게 됐다.

 

수원 앙카라학원의 1960년대 모습
수원 앙카라학원의 1960년대 모습

튀르키예군은 한국전에서 ‘백병전의 튀르키예’로 이름을 날렸다. 그들의 용맹함은 단지 입에서만 전해지지 않는다.

튀르키예군의 첫 전투는 1950년 11월 평안도 군우리에서 치러졌다. 미군의 후퇴를 돕기 위해 중공군에 맞서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어 후퇴했다.

설욕전은 다음해 1월, 용인 김량장리(금양장리) 전투에서다. 중공군이 점령한 김량장리 시내와 151고지를 공격해 1천900명의 중공군을 격퇴했다. 튀르키예군 전사자는 12명에 그쳐 첫 전투의 오욕을 씻고 일당백, 백병전의 튀르키예라는 칭송을 받았다.

전쟁기간 참전국 가운데 튀르키예군 전사자의 수는 미국, 영국에 이은 세 번째다. 하지만 전사자 비율로 따지면 대체적으로 2%에 머무는 다른 참전국에 비해 튀르키예는 5%에 육박한다. 부상과 실종을 포함한 비율 역시 10% 안짝인 다른 참전국의 두 배인 20% 수준이다. 그들이 얼마나 격렬하게 한국을 위해 싸웠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수치다.
 

아이들과 튀르키예 군인들(딘츠튀르크 상사의 아들 알칸 베크만 소장)
아이들과 튀르키예 군인들(딘츠튀르크 상사의 아들 알칸 베크만 소장)

◇앙카라학원을 세우다

전투에서 용맹한 그들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한 없이 다정했다.

나즘 뒨다르 대위의 회고와 같이 전방에서 전투를 수행하던 군인들은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하나 둘 막사로 데려와 보호했다.

당시 튀르키예군의 통역관을 맡은 고 백상기 전 주튀르키예한국대사관 고문은 "이런 현상은 모든 튀르키예군 대대에서 발생돼 보고됐다"며 "너무 많은 아이들을 막사로 데려와 전투를 치를 수 없을 정도였다"며 상황을 전했다.

사정이 이렇자 각 전방부대는 당시 튀르키예군 의무대가 주둔하던 수원으로 아이들을 보냈고 이곳에서 아이들을 돌보기로 한다. 이 때부터 ‘앙카라학원’이 시작된 셈이다.

군인들이 직접 데려온 고아들 뿐 아니라 튀르키예군인들은 부대 인근에 있는 아이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앙카라학원을 설립한 주역 가운데 한 명인 하산 후세인 딘츠튀르크 상사(왼쪽에서 세번째)가 한국사람들과 찍은 사진(딘츠튀르크 상사의 아들 알칸 베크만 소장)
앙카라학원을 설립한 주역 가운데 한 명인 하산 후세인 딘츠튀르크 상사(왼쪽에서 세번째)가 한국사람들과 찍은 사진(딘츠튀르크 상사의 아들 알칸 베크만 소장)

앙카라학원 설립 주역 가운데 한 명인 하산 후세인 딘츠튀르크 상사는 의무대에 있는 아이들 뿐 아니라 튀르키예군에게 음식을 달라고 애원하는 아이들을 뿌리치지 못해 음식을 나누어 주었고, 그 수는 점점 불어나 의무대 막사에서 보호하고 지원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그는 당시 튀르키예여단의 사령관 ‘타신 야지즈’ 준장에게 이 같은 상황을 보고했다.

타신 야지즈 준장은 "이것은 나의 생각과 같고 튀르키예군 모두의 생각과도 같은 것"이라며 따로이 막사와 건물을 배정해 아이들을 본격적으로 보호했다.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을 위해

튀르키예군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최초 앙카라고아원이 설립됐고, 얼마 뒤 앙카라학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곳에서는 전쟁고아를 비롯해 급작스러운 피난으로 아이를 돌보기 어려운 가정의 자녀들도 맡았다.

오수업 앙카라형제회 회장은 "1951년 튀르키예군 막사에서 이미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군인들과 기념사진을 촬영 중인 여자아이(앙카라 참전용사회 소장).
군인들과 기념사진을 촬영 중인 여자아이(앙카라 참전용사회 소장).

'형제의 나라' 별칭다운 특별한 다정함
전쟁통 부모 잃은 아이들 외면 못해… 군인들이 직접 막사로 데려와 보호
대대 전체적 현상 전투 못치를 정도… 결국 의무대 주둔하던 수원서 전담

그와 앙카라형제회 회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아뿐 아니라 형편이 어려운 집안의 아이들도 찾아와 입소하고 교육이 진행됐다는 것.

이는 당시 기사로도 확인할 수 있는데 1951년 7월 7일 조선일보의 기사를 보면 앙카라학원에서 보호 중인 고아와 피난아동을 구분해서 수를 셈하고 있고 또 이들을 공부시키고 있다고 기록했다.

앙카라학원은 영아부터 고등학생까지 아동과 청소년의 버팀목이었다. 또 초등학교 4학년 과정까지는 직접 가르치고, 이후에는 인근 초, 중학교로 진학시켜 배움을 이어갈 수 있도록 했다.

단순한 고아원이 아니라, 당시 한국인의 교육에 대한 열망을 알아보고 가장 필요한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정부에 교사를 요청하고, 튀르키예 본국에서는 학용품 등을 지원받았다.

앙카라학원은 튀르키예군의 따듯한 마음을 알려주는 명백한 증거이며, 그 어떤 혈맹보다 가슴으로 이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영아부터 청소년 보호 '수원앙카라학원'
불어난 고아 피난아 체계적 보육 교육… 韓 정부 교사 요청 본국선 학용품 지원
튀르키예군 따뜻함 당시 신문에도 보도


오수업 앙카라형제회 회장은 "아이들을 위해 쉬는날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놀이기구를 설치해주고 차량이 들어올 수 있도록 인근 도로에 돌을 가져와 쪼개서 포장했다"며 그들의 진심을 전했다.

중부일보는 기획기사 ‘월드리포트 앙카라학원 기억과 기록’을 통해 고아원으로만 알려져 있던 앙카라학원의 오류를 수정하고, 그들의 행적을 되짚으며 왜 한국과 튀르키예가 형제의 나라로 불려야하는지 그 근원을 확인한다.
 

터키군 참전용사 슐레이만에게 남자아이가 뽀뽀를 하는 모습
터키군 참전용사 슐레이만에게 남자아이가 뽀뽀를 하는 모습

◇출국 전, 용인 튀르키예군 참전기념비 참배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동백동 산 16-1.

영동고속도로 마성IC 톨게이트를 통과해 2~3분 뒤 도착한 공터는 화물차 쉼터인가 졸음 쉼터인지 알 수 없다.

그 뒤에는 약 30미터는 돼 보이는 탑이 서있다.

사전에 정보가 없다면 무엇을 위한 탑인지 알아보기 어렵다. 태극기와 같이 나부끼는 아이일리즈(튀르키예국기)가 아니라면 이곳이 튀르키예와 관련된 곳인지도 모를 것이다.

잊혀져가는 튀르키예군의 피 땀 정성
찾아가기 힘든 외진 곳에 세워진 기념비… 1천명 전사자 2천명 부상 실종자 추모용
눈에띄는 표지석 안내문 없이 덩그러니… 역사적 전적지 이유 불구 관리 대접 소홀
수원지지대고개 프랑스군 참전비와 대비

 

용인 튀르키예 참전기념비의 정면 모습
용인 튀르키예 참전기념비의 정면 모습

수많은 운전자 가운데 이곳에 구태여 차를 세워두고 무엇인지 알아보려하는 이는 드물지 않을까. 이곳은 한국전 튀르키예군 참전 기념비다.

튀르키예군은 피 흘려 이 나라를 지켰지만 전사자의 넋과 공을 기리는 기념비는 너무나 외떨어져 있다.

용인 튀르키예 참전기념비 옆에 새겨진 추도문
용인 튀르키예 참전기념비 옆에 새겨진 추도문

외떨어진 것도 문제지만, 얼핏 보기에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없다.

더구나 톨게이트를 지나야 한다니.

찾아가는 이는 당혹스러울 것이며, 지나치는 이는 알지 못할 것이다.

튀르키예 군인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앙카라시에 설립된 한국공원 추도문
튀르키예 군인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앙카라시에 설립된 한국공원 추도문

기념비가 이곳에 세워진 연유는 튀르키예군 제일의 전과 김량장리 전투가 이 일대에서 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까닭에서다. 이를 위해 동상은 튀르키예에서 제작했다고 전해지고 기념비의 모양은 ‘백병전의 튀르키예’를 있게 한 총검의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그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세웠지만 아쉬움 많이 남는 기념비의 위치다.

그러나 당연히 관리도 쉽지 않을 것이다. 참배 당시 동상 머리에는 새똥이 묻어 굳어진 채 그대로다.

용인 튀르키예 참전기념비를 옆에서 바라본 전경 사진
용인 튀르키예 참전기념비를 옆에서 바라본 전경 사진

반면 수원 지지대 고개에 있는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는 큼지막한 글씨는 물론 접근이 쉬워 이와 대비된다.

기념비가 처음 세워질 당시에는 이렇지 않았을 테지만 세월이 흘러 튀르키예군 기념비의 현 상황은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민망하다.

한국전 당시 튀르키예 군인이 여자아이를 돌보는 모습(이스탄불 참전용사회)
한국전 당시 튀르키예 군인이 여자아이를 돌보는 모습(이스탄불 참전용사회)

역사적 전적지 위에 마련됐다 하더라도 톨게이트는 너무했다. 샛길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튀르키예군 기념비임을 알릴 수 있는 커다란 표지석이라도, 안내문이라도 지나가는 이들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방법은 많을 것이다. 부족한 것은 의지일 뿐.

1천 명의 전사자, 2천 명 부상자와 실종자를 기리기 위한 기념비의 민망한 상황에 대해 세월만 탓하기에는 우리의 변명이 옹색하다.

아직 참전군인들이 생존해 있다. 튀르키예에서 만난 그들에게 이 상황을 차마 전하지 못했다.

중부일보 취재팀=강경묵 문화부장·김용국 박사·용인외국인지원센터장·공익법인 아시아문화연구원장·안형철 문화부 기자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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